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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005년9월의 인물 : 나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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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5.09.03 |
첨부파일 | 200509person.hwp | ||
◎ 생애 및 업적 나철은 전남 벌교의 한미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교적 소양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했다. 그가 개화사상에 눈을 돌려 근대화에 눈을 뜬 것도 유학자의 안목에서다. 그가 여러 차례의 도일활동(渡日活動)을 통해 외교적 독립을 외쳤던 것도 유교적 우국지사로서의 행동이요, 을사매국오적에 대한 주살(誅殺) 거사도 유학자로서의 비분강개였다. 나철이라는 인물이 유학자로서의 허물을 벗고 국학자로서 변신하는 계기는 단군신앙을 접하면서다. 그는 대종교 중흥(단군신앙의 부활)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의 회복을 통해,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신교(神敎) 정신으로 그리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우뚝 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국학적 관점에서 나철의 대종교 중흥은, 동학의 창도로 나타나는 수운사상 그리고 증산교의 창교로 대두되는 증산사상을 비교함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다. 즉 홍암은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重光:다시 일으킴)을 택함으로써, 사상적·시간적·공간적 특성을 두루 갖춘 순수국학적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동학과 증산교보다 후에 일어난 대종교에 의해, 우리의 국교 관념이 대두되고 국어·국사의 연구가 주도되었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나철이 단군 신앙의 중흥을 모색한 배경에는 평소 그가 품어 온 정신의 중요성이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망국으로 치닫는 격변기에 우국의 행보를 옮기면서도, 늘 시대적 사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정신’을 갈망했다. 그가 평소 품어오던 ‘국망도존(國亡道存: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의 가치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부활을 후일 대종교의 중광에서 찾는데, 박은식이 찾아 지키고자 했던 ‘국혼’과 신채호가 갈구하던 ‘국수’의 의미로도 연결되는 것이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 민족 문화의 찬연한 업적이다. 그것은 정음(正音)이라는 명칭으로 출발하여 언문·반절·국문 등으로 명명되면서 근대 한글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민족 문화의 업적이 구한말까지도 국어로서의 떳떳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조 지식인들의 언어가 한문을 공식적인 언어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나철은 또한 한문 지식을 배경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행세한 인물이다. 물론 대종교를 중광한 후에도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서나 논문을 남긴 것도 없다. 그러나 홍암이 단군교단으로부터 받은 「단군교포명서」나 규약문류(規約文類) 그리고 그가 작사한 노fot말을 보면, 나철의 순수한 우리말 사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 단어·한 글자에 유려하고 세련된 조탁에 의해 펼쳐지는 나철의 순수 우리말 구사 능력에서, 주시경·김두봉·이극로 등으로 이어지는 한글 운동의 동인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나철은 국사인식에서도 기존의 유교·불교 사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는 단군교단으로부터 전수받은 교리(敎理)·교사(敎史)와 「단군교포명서」등과 같은 문류(文類)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다. 그는 반존화적 역사관과 함께 신교적(神敎的) 정신사관을 통하여 민족사학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김교헌·박은식·신채호로 이어지는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지평을 개척했다. 또한 나철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국교의식을 환기시켰다는 점이 특기된다. 그는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연면히 흘러온 종교이며, 우리 민족의 종교적 사유를 가장 옹글게 간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최치원의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에 나타나는 국교의식을 통하여, 최치원의 현묘지도(풍류도)야말로 한국 고대종교의 결정체로서, 국가적·민족적·영토적·문화적 통합에 의해서 형성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창적인 종교요 사상이며 문화로 파악했다. 나철의 이러한 국교의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파급되는데, 특히 박은식은 대종교가 국교의 가치가 있음을 『한국통사』에서 언급했고, 신채호도 단군신앙이 우리 민족의 국교임을 주창했으며, 정인보 역시 해방 후「순국선열추념문」을 통하여 국교의 기원을 단군에 두고, 나철을 국교(國敎)로써 민족의 뜻을 뭉치려 하였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철학적인 방면에서도 나철의 업적은 적지 않은 의미를 남긴다. 선도(仙道)·풍류도 혹은 현묘지도라는 추상적인 가치로 전래해 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체계를 유·불·선을 통섭(統攝)하는 삼일철학(三一哲學) 혹은 종사상(倧思想)이라는 가치로 체계화시킨 인물이 나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일철학의 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가 저술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이다. 「신리대전」은 대종교의 전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신훈(神訓)’을 ‘신위(神位:한얼자리)’, ‘신도(神道:한얼도리)’, ‘신인(神人:한얼사람)’, 그리고 ‘신화(神化:한얼교화)’라는 네 방면으로 풀어 해석한 글이다. 나철은 이 글에서 대종교 철학의 근본인 삼일을 철학적 원리로 명쾌히 구명하고 있다. 나철의 대종교 중광은 전래 유속을 일깨우고 인습을 혁파하는 대도 한 몫을 한다. 개천절의 부활·정착을 위시하여,「단군교포명서」에 언급되는 한복 윗도리의 동정(東旌), 땋은 머리 뒤에 매는 댕기(檀戒·檀祈), 그리고 성조신(成造神)·선령당(仙靈堂)·고수레[高矢禮] 등의 유습 배경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또한 편발개수(編髮盖首)와 일본에서 지켜지고 있는 십팔성(十八姓) 유족의 단군신앙 제사, 동신성모(東神聖母)를 모신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우신관(佑神觀), 그리고 스사노노미코토(素盞鳴尊)를 모신 일본 출운사(出雲社)의 배경을 단군신앙에서 근원을 찾는다. 또한 홍암은 부여 풍속으로 내려오는 구서(九誓)와 고려속인 팔관의 준수를 유훈(遺訓)하고 있다. 특히 선의식(䄠儀式)의 제정을 통한 홍암의 제천보본은, 예로부터 삼신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천제(天祭)를 복원시켰다는데서 전례사적(典禮史的) 의미가 크다. 즉 홍암의 제천은 삼신의 신위를 모시고 행한 근대 최초의 천제이었다는 점과 하느님께 올리는 우리 고유의 제천의례인 선의식을 처음으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대의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유교적 제례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홀기(笏記)를 제정하여 우리 고유의 제천의례를 시현·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더불어 나철 국학의 심지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수행적 실천 부분이다. 그것은 단군 시대부터 전래되어 오는 성통공완(性通功完)의 방법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신라의 화랑과 같은 집단에서 중요한 체행과정으로 시행된 것이다. 이러한 수행정신은 우리 민족 무사혼의 뿌리가 되고 상무정신의 토대가 됨으로써, 문무가 겸비된 인간완성을 구현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수행이 사회 혹은 국가 또는 민족 집단의 성정(性情)을 연단(鍊丹)하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올바른 수행의 도가 존재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차이는 성정상의 선진과 후진의 집단으로 구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철의 수행실천은 그 중요성을 더한다. 그의 국학이 수행적 방면에서도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수행의 메커니즘에서 중국 도교적인 요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먼저 홍암은 도맥의 근원을 단군 시대로부터 찾고 그 수행의 목표도 「삼일신고」‘진리훈’을 토대로 하여 성통공완을 통한 홍익인간을 구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의 수행은 기존 중국 도교적인 정·기·신이 아니라, 삼진(三眞: 하늘의 本性)인 성(性)·명(命)·정(精)이 존재하고 그와 대(對)가 되는 삼망(三妄: 인간의 俗性)으로 심(心)·기(氣)·신(身)이 있어, 인간의 속성을 물리치고[返妄] 하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卽眞]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나철의 국학정신은 닫혀있는 가치가 아니다. 흔히들 국학하면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가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바람직한 국학의 본질이 자기만을 고집하는 ‘닫힌 학문’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올바른 연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해 가는 ‘열린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홍암의 국학 정신이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철은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킨(대종교 중광) 1909년을 기점으로 소아적 우국지사에서 대아적 사상가로 변신했다. 나철의 이러한 사상관에는 종교라는 일반적 상식과 함께 우리의 홍익인간적 사상관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먼저 종교라는 것은 인간보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는 점과 인간과 인간 관계 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관계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또한 종교는 인간의 세속적 질서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 아닌 선악관념에 의해 질서가 잡혀간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도 백두산 북쪽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가면 초라한 무덤 셋이 있다. 하나는 민족사관의 선봉에 섰던 무원 김교헌이고 또 하나는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백포 서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국학의 선각인 또 한 사람의 무덤이 그 곳에 있다. 국학이 무너진 우리의 분단 현실을 세월의 무게로 짊어진 채로, 1916년 8월 15일 자진순명(自盡殉命)한 홍암 나철의 무덤이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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