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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평구 역촌동 '인조별서유기비' 보물 지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2.20
첨부파일 �Ʒ����ѱ� ÷������보물_지정(인조별서유기비).hwp

문화재청(청장 兪弘濬)은 2월 17일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제1462호로 지정하였다.

금번 보물로 지정된 "인조별서유기비"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 주택가에 낮은 구릉에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주변에 하마비(大小人皆下馬)가 있다.

이 비석은 숙종 21년(1695), 인조반정을 통해 조선 제16대 왕이 된 인조(재위 1623~1649)가 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머물렀던 별서에 세운 것으로서, 인조반정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그 현장을 증명하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

표제는 조선 19대 숙종(肅宗)의 어필(御筆)로서 "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비(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遊基碑)"라고 쓰고 뒷면 음기(陰記)는 숙종의 어제(御製)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써 가치를 더해준다.

이 비석의 귀부(龜趺)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조선시대 초기 양식의 전통을 잇고 있는 동시에 간결한 한옥 모양으로 변화된 지붕돌을 이수 대신 사용하고 있어 후기 석비 양식의 특징을 완전히 보여주고 있어 조선시대 석비 비신은 화강석으로 되었고 팔각과 12각의 이중기단 위에 놓여 있는 귀부는 운문(雲紋)으로 조각되어 있다.

귀두는 험상궂은 형태로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낸 상태이며 특히 눈 위는 두툼하게 장식하고 꽃무늬로 조각하였다. 비신 위에는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으로 덮었고, 비신의 높이는 168cm이며 폭은 72cm, 두께는 26cm로 되어 있다.

비문은 어제(御製)로 오위도총관 항(杭)이 썼다.

광해군은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존호를 폐하여 서궁(西宮, 현 덕수궁)에 유폐하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였다. 이에 당시 능양군으로 있던 인조는 서인 일파이었던 김류(金?),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의 제신과 더불어 이 곳에서 반정을 모의하여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거병하여 홍제원에 집결한 지방군과 합류, 거사 직전 이이반(李而쮎)의 누설에도 불구하고 반정(反正)에 성공하였다.

광해군을 폐하고 대북파를 몰아내어 왕위에 오른 인조가 이 혁명거사를 기념키 위해 세운 비가 곧 인조별서유기비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곳에서 합세할 때에 이서(李曙)의 군이 늦게 도착하였다 하여 연서(延曙)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비 근처에는 인조의 별장 즉 연서별서가 있었던 것 같고, 인조별서유기비는 후일 숙종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 같다. 의 조형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인조별서유기비의 전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前面>

御筆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

<後面>

御製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陰記

顯祿大夫東平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臣 杭奉 敎書

洪惟我

仁祖大王龍潛之日別墅在北部延曙驛村之後漢都十里之 內不遠而邇也盖玆地靈氣攸種佳祥鬱口豈非惟天惟祖宗陰 콋以玉成我 聖祖也耶是本我 元宗大王在 龍潛時嘗有以經 營之也規制草草專尙朴素我 仁祖大王克紹儉德不曾恢拓時 擧 王趾消遣世憂方是時也光海昏亂已極 宗社之危迫在呼 吸我 仁祖大王應天順人撥亂反正明倫紀於旣扱拯生民於塗 炭化家爲國光復 前烈口伊天啓癸亥三月十一日乃改玉之前 一日也爰與二三心쪺之臣 駐憩于是亭然則我 聖祖中興之 業實基乎斯可以與海州之芙蓉堂口美而匹休於戱其盛矣不 幸歲月寢久亭報蕩然柱礎獨存鞠爲茂草使我 聖祖再造之地 作一荒廢之所竪淵碑而怜事蹟尙今闕焉予恐文獻無徵側代 愈遠而事愈泯짞命內臣而董之修其遺址?以周墻托貞珉而 紀實傳盛烈於來後庶乎其億萬斯年而無疆云爾 歲在己亥之 秋七月壬午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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